베르나르 베르베르 「신」

2008/12/22 08:22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뛰어난 글쟁이다. 중학교 시절, 도서관을 매일같이 들락날락 거리며 빌려 보았던 개미에서도 그러했고, 이후 차례로 읽었던 타나토노트나 아버지들의 아버지, 뇌 등 그의 대부분의 소설에서 그러했다. 물론 개미를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걷는다는 느낌은 있지만, 그런 것들과는 별개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여전히 뛰어난 글쟁이다.

한 번 읽으면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그만의 몰입감이나, 허황찬란한 이야기라도 그가 말하면 진짜일 것 같은 과학기자 출신이란 경력을 살린 현실감 등 여러 장점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란 이름을 달고 출시되는 신작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보고야 마는 내 독서습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실 부끄럽게도 책을 손에서 놓은지가 꽤 되었기에, 입대 전 책 스무권은 반드시 읽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었는데, 교내의 서점에 떡하니 놓인 신을 보니 역시 지나칠 수 없었다. 지갑이 비어있던 데다가 시험기간이라 걱정은 됐지만, 뭐 그게 대수랴. 메마른 내 감정에 불을 지피는 것에 비하면 돈이나 학점은 별 문제가 안된다. (…)

그렇게 읽게된 베르나르의 신작 뇌는 뭐랄까. 나무 이후로 계속적으로 느끼는 실망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계기가 되었달까. 인터넷으로 찾아본 서평엔 역시 그만의 상상력이 있다며 호평일색이지만 그런 평가들만큼의 가치가 있는 책인지 잘 모르겠다. 내 취향이 변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느낀건 더도말고 덜도말고 실망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베르나르의 장점 중 하나는 그만의 과학적 현실성이다. 과학기자 출신인 그가 주장하는 것들은 그 어떤 것도 현실감있게 와닿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장점이었다. 게다가 그는 강한 집념과 관찰력을 바탕으로 11년 동안 1백번이 넘는 퇴고를 거쳐 개미라는 걸작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물론 그를 뒷받침하는 독특한 상상력이나 몰입감이 글을 더욱 맛깔나게 만들지만, 소설은 허구적 내용일지라도 현실감있게 와닿을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가 과학적 현실성을 잃은 듯 보인다. 파피용 때부터 그랬다. 길이 32km 지름 5백미터의 거대한 지구대용 우주선을 만들며 원심력과 같은 최소한의 기초적 과학지식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을 때부터 의심스러웠다. 파피용은 읽을 때엔 '이런 것도 있을 수 있겠구나'란 기발함과 현실성보다 '이게 말이 돼?'라는 의구심이 계속 일었다.

아래는 파피용을 읽을 당시 썼던 일기의 한토막이다.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개미+타나토노트+인간'이 떠나가지 않았다. ……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지루하다. 그리고 뻔하다. 참신성이 떨어진다. 지금까지 베르나르에게 붙어있던 수식어의 모든 반의어를 갖다 붙여도 될 것 같다. …… 지름 5백m. 길이 32km. 시속 250만km의 우주범선은 이론도 감정이입도 불가능해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일까. ……
 
늘 말하지만, 베르나르. 난 10년에 한 번씩 당신 작품 봐도 좋으니 부디 내 기억에서 잊혀지지 말기를 바라요.
파피용은 번역을 이세욱 씨가 맡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과학에 대한 각주가 부족했다. 전문용어라도 좋으니 내게 그럴듯하게 와닿을 현실성의 근거를 가져와주길 애타게 바랐는데, 그런 것들이 부족했다. 뇌나 아버지들의 아버지를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베르나르의 책을 읽으면 마치 그가 지식 자랑을 하고 있는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과학적 지식을 쏟아부었는는데….

신도 마찬가지다. 신 후보생들이 지구를 다루는 과정에서 몇가지 과학적 정보는 언급되지만 그 과정은 그저 '정신을 집중'하고 '앙크를 쏘는' 정도로 묘사된다. 신들은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마음을 떠난 책에게 그정도 관용을 베푸는 건 불가능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위해 기존의 것들을 차용해놓고 신들의 세계는 여전히 지엄하고 전능하니 정신만 집중하면 지구쯤은 쉽게 만들어지는 세계로 만들어버리는건 베르나르답지 않다. 신들이 그렇게 전지전능하다면 애초에 인간을 만들 때 DNA구조나 척추구조 따위에 신경을 쓰진 않았겠지.

현실은 자기 편할대로 재구성하면서 그 설명은 미약하고, 한국 독자들에게는 떡하나 던져주듯 한국인을 등장시키고 한국에 대해 서술해주는 베르나르의 모습이 이번 신작에서 극대화되는듯해 그저 실망스러울 뿐이다. 이미 전작에서 했던 얘기와 세계관을 억지로 이어붙이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고 말이다. 천사들의 제국까진 그게 이를 완벽히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쩜 그의 상상력은 천사들의 세계까지인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신의 세계는 너무 거대한 영역인지도.

이런 실망 속에서도 다행스러운건 여전히 그가 뛰어난 글쟁이란 점이다. 그가 글을 그렇게 잘 쓰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이 책을 3류 판타지 정도로 생각하고 덮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학문적인 내용을 다룬 비문학이라면 모르겠지만 문학 소설을 읽으며 내용 하나하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토를 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기분들을 그의 글쓰기가 억눌러주었다. 전혀 무관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며 연결지어나가는 능력 하나만큼은 역시 최고니까.


아마 내년이면 그의 또다른 신작이 등장할 것이다. 군에 있을테니 바로 읽어보지는 못하겠지만, 이대로라면 읽지 못하더라도 그다지 아쉽지 않을 듯하다. 물론 그 다음 책에서 전작들의 등장인물이나 문구가 등장하면 생소하게 여겨지겠지만, 그 역시도 있으나 마나가 아닐까 이젠.

파피용을 읽고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해야할 것 같다.

베르나르, 당신이 개미를 쓰며 보여줬던 열정과 호기심과 집중과 관찰을 한 번만 다시 보여줘요.
그리고 내게로부터 더이상 잊혀지지 않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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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신 -베르나르 베르베르

    Tracked from 김재호의 디지털보단 아날로그 2009/01/05 21:19 del.

    신 1 -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열린책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새로운 이야기이다. 나는 컴퓨터 공부를 시작한 이후로는 이런 종류의 책들을 전혀 보지 않는데, 그래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은 나올 때 마다 꼭 본다. 나는 그가 쓴 거의 모든 책들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 '뇌'가 가장 재미있었다. '뇌'는 내가 읽은 그의 첫번째 책이었는데, 그래서 그 책을 가장 재밌게 봤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상상력. 그리고 다른 공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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